从网上韩国朋友那里了解到韩国也有我们皮氏族人。那就是韩国洪川皮氏和槐山皮氏。都是源自中国,与中国皮氏同宗,在韩国洪川一带比较有名气,所以在韩国称“洪川皮氏”
那边的族人具体是什么时候因什么原因去的韩国有待进一步的考证
引用:
홍천 피씨 (洪川 皮氏)
시조(始祖) : 피위종(皮洲宗)
시조 피위종(洲宗)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금오위상장을 역임하고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병부시랑을 역임하였다.
[원래 피씨는 주나라 경사인 번중피(樊仲皮)의 제일아랫자인 피(皮)를 따서 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피위종의 맏아들 피인선(寅善)이 정당문학(政堂文?), 좌복야(左?射)를 지내고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홍천(洪川)을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는 원나라에서 금오위 상장군을 지낸 피위종으로 전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려 충렬왕 때 동국안렴사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하게 되었는데, 충렬왕이 크게 기버하여 병부 시랑을 제수하였고, 뒤에 좌사의 대부(중서 문하성의 낭사 벼슬, 정3품)에 추증되었으며, 그이 맏아들 인선이 정당문학 ? 좌복야(상서 도성에 속하였던 정2품 벼슬)등을 지낸후 홍천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홍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인선의 아들 맹문이 승지를 지냈고, 손자 원휴는 한림학사(한림원에 속하는 정4품 관직)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고려 말에 순창 현령으로 나간 원량은 재임기간 동안 왜구 방비에 공헌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다. 조선 헌종 때 학자로 유명한 병추는 학문이 깊고 문장에 뛰어나 명망이 높았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피인선(皮寅善) 고려조에 좌복야를 역임하였다.
피인고(皮寅古) 고겨 때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피맹문(皮孟文) 고려 때 승지를 지냈다.
피맹인(皮孟仁) 고려에 직학사를 지냈다.
피원휴(皮元休) 고려에서 한림학사를 역임하였다.
피자휴(皮子休) 고려 때 상서를 지냈다.
피원량(皮元亮) 고려에서 현감을 역임하였다.
피병추(皮秉?) 조선 헌종 때 학자로 유명하다.
피재구(皮栽九) 조선조에 참의 지냈다
피영기(皮永基) 조선 때 사성을 지냈다
피연길(皮然吉) 조선 때 참의를 역임하였다
피세숙(皮世塾) 조선에서 한성판윤을 지냈다.
[ 인구(人口) ]
1,265명. (1985년)
1,143명. (2000년 통계청)
韩国槐山皮氏
引用:
괴산 피씨 (槐山 皮氏)
시조(始祖) : 피득창(皮得昌)
시조 피득창(得昌)은 조선의 개국공신(檫?功臣)으로 병조판서, 전라감사(全吝毕司)를 역임하고 괴산(槐山)에 살면서 후손들이 홍천 피씨(洪川皮氏)에서 분관하여 괴산(槐山)을 본관으로 하였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피강지(皮康芝) 조선 대 장령을 지냈다
피 정(皮 ?) 조선 때 진사였다
피 소(皮 ?) 조선 때 목사를 지냈다
피정만(皮正?) 조선조에 영장을 지냈다
피홍군(皮洪君) 조선 때 판서에 올랐다.
피경송(皮卿松) 조선 때 통덕랑을 역임하였다
피능화(皮能和) 조선 때 관직이 첨사였다.
피동현(皮洞忝) 조선조에 방어사를 역임하였다.
피천백(皮川?) 조선 때 주부를 지냈다.
피선원(皮宣源) 조선 때 목사를 역임하였다.
피종남(皮宗南) 조선 때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피세만(皮世孺) 조선 때 관직이 판관이었다
피세담(皮世淡) 조선 때 통사랑을 역임하였다.
피운손(皮?咪) 조선조에 효행이 지극한 효자였다
피경우(皮景钓) 조선 때 통덕랑을 지냈다.
피봉준(皮?俊) 조선 때 참봉을 지냈다.
[ 연원(?源) ]
피씨는 문헌에 30여본이 나타나 있으나 괴산피씨와 홍천피씨외에는 시조 등을 알 수가 없다.
피씨의 연원(?源)은 "조선씨족통보"에 중국(中?) 천수(天水)에서 계출된 성씨로 적고 있으며, 주(周)나라 경사인 번중피(樊仲皮)라는 사람이 공명(功名)이 있어 이름 마지막 글자인 피자(皮字)를 따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뒤 진나라 효제 때 피초라는 사람이 위문장을 지냈다고하며, 당나라 때 피일휴와 그의 두 아들 피중업(仲?), 피광업(光?)이 문명(文名)을 떨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피씨(皮氏)의 연원은 「조선씨족통보」에 중국 천수(天水)에서 계출된 성씨로 적고 있으며, 주나라 경사인 번중피(樊仲皮)라는 사람이 공명이 있어 이름 마지막 글자인 피자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뒤 진나라 효제 때 피초(皮初)라는 사람이 위문장을 지냈다고 하며, 당나라 때 피일휴와 그의 두아들 중업, 광업이 문명을 떨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피씨(皮氏)의 본관은 홍선(洪川) ? 괴산(槐山) ? 단양(丹?) ? 광주(?州) ? 충주(忠州) ? 파주(坡州)등 32본 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현존하는 관향은 확실하지 않다. 괴산 피씨(槐山 皮氏)의 시조 득창은 조선의 객국공신으로 병조판서 ? 전라감사 등을 지내고 괴산에서 정착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홍천 피씨(洪川 皮氏)에서 분적하고, 괴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득창의 아들 강지가 장령을 지냈으며, 손자 정과 증손 소는 목사를 역임하여 판서에 오른 후손 홍군, 통덕랑 경송, 방어사 동현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 외 통정대부(정3풍의 당상관 품계) 종남과 판관 세만, 통사랑 세담이 유명했으며, 효자 훈손, 통덕랑 경우, 참봉 봉준 등이 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 항렬표(行列表) ](辈分表)
16세(世) 17세(世) 18세(世) 19세(世) 20세(世) 21세(世)
경(景) 예(禮) 봉(?) 호(浩) 상(相) 찬(?)
[ 인구(人口) ]
2,413명. (1985년)1985年2413人
2,204명. (2000년 통계청)2000年2204人